사교를 위한 여가 활동
술이 사교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니까요. 뜻을 조금 바꾼다면 사교를 위한 여가 활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술의 노예가 되면 수많은 ‘사교의 시간’이 말 그대로 여러분을 지나쳐 가 버립니다. 술을 ‘시간을 흘려보내는 활동’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술 때문에 놓친 그 모든 행복한 저녁, 밤 외출, 결혼식, 세례식, 파티, 지적인 대화, 춤, 놀이, 유쾌한 농담, 그리고 수많은 날을 생각해 보세요. 몸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이 나가 있어서 놓친 시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물 때문에 의지력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단속하고, 통제해야 해서 놓치는 시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 날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면 아예 외출하지 않기로 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갔다가는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이 마시게 되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탓에 밤새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 들 것이고 그것도 똑같이 괴로울 줄 알았기 때문에, 혼자 집에 있곤 했습니다.
술의 가장 큰 문제는 마시든 마시지 않든 결코 본래의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해야 해서 술을 자제해야 한다면 본래의 자신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해 우울하고 뭔가 빼앗긴 기분이 들 테니까요. 그렇다고 술을 마시면 그때도 본래의 자신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술이 감각을 무디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감정이든 진정으로 느끼려면 감각이 필요합니다. 술은 말까지 어눌하게 만듭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대단히 중요한 수단인데 말입니다. 이 약물은 이성과 상식도 모조리 앗아 갑니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시끄럽게 만들며, 때로는 심술궂은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게 합니다. 불쾌하고 성가시며, 말을 어눌하게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데, 이건 분명 사교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술은 사람을 멍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뇌와 입 사이에 있는 아주 중요한 검문소들을 없애 버린다는 점입니다. 제가 어떤 검문소를 말하는지 아실 겁니다. 생각을 점검해서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생각이 말로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검문소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술은 그 꼭 필요한 검문소들을 없애 버립니다. 그래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오르든, 그것이 아무리 불쾌하고 무례하고 모욕적이고 어리석든,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러다 몇 시간이고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일이 흔합니다. 물론 이 약물의 마취 효과 때문에 아예 정신을 잃고 쓰러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쓰러지는 편이 모두에게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기절은 시간을 훌쩍 보내는 훌륭한 방법이니까요.
술을 끊고 나서 저는 멋진 새해맞이 전야 파티에 갔습니다. 아주 친한 친구들과 함께한 블랙타이 정장 차림의 행사였습니다. 즐겁게 어울리는 저녁을 보내기 위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 좋은 음식, 멋진 분위기, 훌륭한 음악, 그리고 새해라는 좋은 축하 명분까지 말입니다. 게다가 밤새 샴페인이 무료였습니다. 다만 무료라는 말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치러야 할 대가가 있으니까요. 저녁 초반에는 제가 왜 술을 마시지 않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답하느라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문제는 한 장을 따로 할애할 만한 이야기이니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알코올이라는 약물, 그날 저녁에는 샴페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린 그 약물은 많은 사람에게 파티의 나머지 시간을 망쳐 놓는 데 한몫했습니다. 그중 많은 이들이 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바 카운터에 축 늘어져 있었고, 빅벤이 새해를 알리는 종을 울리기도 전에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대체 그게 어디가 사교적이라는 걸까요? 다른 사람들은 처음 두어 시간 동안은 괜찮았습니다. 저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서로 소통하며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한두 시간 동안은 겉보기에 멀쩡한 이유는 우리 몸이 아주 영리한 생존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매주 술을 계속 마시면 우리 몸은 이 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자동으로 면역과 내성을 키웁니다. 이는 같은 효과나 환상을 얻으려면 점점 더 많이 마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애 처음 마신 술에는 녹초가 되었는데, 이제 같은 결과를 얻으려면 훨씬 더 많이 마셔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약물을 많이 섭취할수록 몸은 그에 대한 면역을 더 키우고, 면역과 내성이 커질수록 똑같은 환상의 효과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약물이 필요해집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모두 멀쩡했고 잘 어울렸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들을 사교적으로 만든 것은 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사교적으로 만든 것은 파티에 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이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므로, 저 역시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들 못지않게 잘 어울렸습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술기운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자 어김없이 벌어질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너 씨_ _ 진짜 사랑한다!’였다가, ‘너 씨_ _ 진짜 사랑한다고, 이 새끼야!’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냥 ‘이 새끼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그해 최고의 파티가 되어야 했던 자리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고, 공격적이고 불쾌하게 굴거나 심술을 부리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참석자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이 되어 눈물을 흘리거나 질투에 사로잡혔습니다. 넘어지는 사람, 바닥에 쓰러지는 사람, 바 카운터나 테이블에 축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간신히 서 있는 사람들은 헛소리를 늘어놓거나 춤을 추었지만, 뭐, 춤이라고 할 만한 것을 추었다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진짜 자신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그날 저녁 자신이 무엇을 경험했는지도 몰랐습니다. 평생 기껏해야 여든 번이나 아흔 번쯤밖에 맞지 못할 새해 전야 중 한 번을 그렇게 놓친 것입니다. 다음 날 즐거웠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거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이 기억나지 않는데 대체 즐거웠는지 어떻게 안다는 걸까요?
실제로 그들은 술기운이 돌기 전까지는 사교적으로 어울렸지만, 술기운이 돌자마자 어울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새벽 네 시에도 여전히 서서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몇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지만 함께 어울릴 사람이 더는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마신 술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면 너무나 분명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술이 사람들의 사교를 도와준다고 확신했습니다.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는 더욱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다들 이야기를 나누고 어색한 시간을 넘길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자주 잔을 채워 줘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색한 시간은 여전히 있고,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줍음이 많고 자기표현을 어려워한다면 술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타조가 모래에 머리를 박는다고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술은 억제력을 풀어 놓고 정신을 멍하게 만들어, 진짜 자신과 술에 취한 수줍은 사람 사이의 간극을 더욱 벌려 놓습니다. 예전에 저는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도 밤새 같은 자리에 머물며 이미 아는 몇몇 사람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흔히 그렇지 않나요? 사교 모임에서 우리는 이미 아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저녁 식사 모임에서 말이죠. 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편안하고 이미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제가 술 대신 다른 것을 마셨다면 비사교적이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술을 끊었다는 이유로 집에 틀어박혀 풀이 죽어 있거나, 어떤 이유로 술을 마실 수 없어 사교 모임에서 우울해하고 있었다면, 그렇습니다. 그건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이었겠죠. 하지만 그 문제들을 일으킨 것도 어쨌든 술이었을 겁니다. 술을 마실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겪지 않으니까요. 마음속으로 무언가 빼앗겼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입으로 무엇을 마시든 즐겁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 중에도 아주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 있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 중에도 그만큼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도 삶의 일부입니다. 술은 그런 사람들이 어울리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정반대의 효과를 냅니다. 술은 그들을 시끄럽고 멍청하게 만들고, 남에게 폭언을 퍼붓게 하며, 음주에 따르는 다른 모든 불쾌한 증상까지 드러내게 합니다. 결국 처음보다 사람들에게 더 인기를 잃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약물 중독은 사교적으로 보입니다… 중독자 본인에게는 말이죠.
스위스에는 헤로인 중독자들이 합법적으로 헤로인을 구해 주사할 수 있는 공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 공원은 펍과 같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헤로인 펍인 셈입니다. 중독자들이 드러내 놓고 약물을 투여하면서 동시에 다른 중독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같은 공원으로 돌아갑니다. 만약 그날 친구들이 모두 공원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갈까요? 네, 물론 갑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것이 아니라 약물을 구하려는 것이니까요. 이 중독자들은 분위기나 날씨, 사교 생활 때문에 공원에 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약물 때문에 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니 다른 어느 곳보다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펍이 딱 한 곳뿐이라면, 여러분도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필요한 약물을 섭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려고 혼자 펍에 들어간 적이 많습니다. 신문을 펼쳐 놓고 술을 한잔 마시며 쉬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 같은 곳도 있죠. 그곳이 훨씬 더 조용하지만, 저는 도서관에 가는 쪽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헤로인 중독자는 헤로인을 쓰는 것이 사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랙 중독자는 크랙을 하는 것이 사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은 술을 마시는 것이 사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술을 마실 때는 대부분의 음주자들처럼 이런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은 즐겁고 사교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누군가 저와 다른 시간대에, 예를 들어 아침에 그 약물을 섭취하면 곧바로 그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 대부분이 그러지 않나요? 모든 약물 중독자가 그러지 않나요? 저는 남을 판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었으니까요. 사실 그건 그저 ‘여러분, 보세요. 이 사람은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통제하지 못하지만 저는 통제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의 약점이라고 믿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실제로는 제 약점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입니다. 늘 일을 미루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인생은 엉망이 되지만, 여러분이 사소한 일 하나를 미루는 것을 보면 곧바로 달려들어 여러분의 미루는 버릇을 비난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알다시피, 자신은 맨정신인데 상대방이 취해 있으면 정말 싫습니다. 그들이 사교적이고, 자신감 있고, 용감하고, 유쾌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독자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로 생각합니다. 몹시 비사교적이고 성가시고 멍청하게 군다고 생각하며, 대개는 그들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못 견딥니다.
누군가 펍에서 여덟 파인트를 마시면 대체로 사교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사업가가 매일 밤 스카치위스키 반 병을 들이켜면 알코올 중독자로 여겨집니다. 누군가 점심을 먹으며 와인 반 병을 들이켜도 아무도 한마디 하지 않지만, 누군가 벤치에 누워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있으면 그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 대부분은 다른 음주자들을 판단합니다. 왜일까요? 물론 자신을 더 낫게 느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요즘 아무개가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봤어? 어젯밤엔 혼자 와인 두 병을 마셨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또 다른 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에 내가 뭘 할 건지 알아?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놓고 좋은 와인 한 병을 따서 책을 읽으며 쉴 거야.’ 집에 가서 그냥 혼자 와인 한 병을 마시겠다고 했다면 제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렸을 겁니다. 하지만 좋게 들리도록 말하니 이 약물의 섭취를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약물 중독자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약물 섭취를 정당화하려 합니다. 용인된다고 여겨지는 시간대와 다른 시간에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판단한 적이 없나요? 다른 사람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비난한 적이 있나요? 술을 마시는 사람은 흔히 ‘나는 너보다 도덕적으로 낫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술을 마셨다고 말했지만, 술을 마시는 행위의 어디가 사교적이라는 걸까요? 사교적이라는 것은 서로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사람과 대체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 술을 마시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능력을 높여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거짓말입니다. 그 거짓말, 또는 환상은 우연히 술을 마시는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행위가 사교적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술을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친구들과 주말에 수상스키를 타러 웨일스의 애버도비라는 곳에 갔습니다. 첫날 밤에 모두 펍에 갔는데, 누군가 제게 어떤 ‘독’을 마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파인애플 주스에 레모네이드를 섞어 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차례에 한턱내던 친구는 ‘아니, 그러지 말고, 진짜로 뭐 마실 건데?’라고 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꺼내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저는 그냥 운전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소용없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도 운전을 해야 하지만, 차는 모두 그 자리에 두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예약해 둔 미니버스를 함께 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무알코올 음료부터 마시고 싶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한마디씩 하며 그다음에는 뭘 마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결국 더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했을 때 이성애자 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저는 정말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술을 끊었다고 말했을 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할 뿐입니다. 이 ‘고백’이 이토록 큰 관심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마치 방금 커밍아웃을 한 기분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질문은 이랬습니다. ‘아, 네가 술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네. 알코올 중독자야?’ 그 질문은 당연해 보입니다. 술을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딱 한 가지, 통제력을 잃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고 믿도록 우리가 조건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따져 보면 이 질문은 터무니없습니다. 저는 더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 어떻게 술 문제가 있을 수 있나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즉 약물을 섭취하면서 제게 술 문제가 있느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헤로인 중독자가 여러분 앞에서 헤로인을 투여하다가 여러분에게도 권했는데, 여러분이 거절하자 ‘네가 헤로인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네. 헤로인 중독자야?’라고 한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요? 여러분이라면, 아니 누구라도 대체 어느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까요? 그 정도를 알아내는 데 셜록 홈스가 될 필요는 없겠죠?
애버도비에서 친구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했습니다. ‘야, 이 재미없는 새끼야. 너 왜 그래, 이 비사교적인 자식아?’, ‘그러지 말고 긴장 풀고 놀자. 우린 즐기러 온 거잖아.’ 그런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체 제가 언제 재미없는 사람이 된 걸까요? 어느 순간에 비사교적인 사람이 되었나요? 제가 언제 즐기지 않겠다고 했나요? 그들이 제게 뭘 마시겠느냐고 묻기 바로 전까지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잘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한 순간부터 대체 무엇이 달라졌나요? 저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했고, 따분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함께 밖에 나와 있었기에 사교적으로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제가 더는 공모자가 아니었으므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약물을 섭취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같은 약물을 섭취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방에 있을 때 자신이 알코올을 섭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같은 거짓말을 하며 그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그날 밤 저는 그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담배를 피울 때 주변에서 담배를 끊은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습니다. 저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으니까요. 선택할 수만 있다면 모든 흡연자가 담배를 끊고 싶어 하며, 모든 흡연자가 비흡연자를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술에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술을 마시던 때에도 술을 끊었거나 잠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지 않았습니다. 사실 세뇌된 제 마음 한편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안쓰럽게 여겼습니다. 결국 저는 그들이 좋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술을 마실 때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술을 마실 수 없어서 비참해하고 우울해했습니다. 술을 간절히 그리워하며 무언가 빼앗긴 기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대체 왜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비참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고, 우울한 상태에는 부러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술을 끊는 것이 두려운 것도 당연합니다. 이제 담배를 그리워하지 않는 금연자가 말 그대로 수백만 명이나 되는 흡연의 경우와 달리, 술을 끊은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희생했다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데 저는 하필이면 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고,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춤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술을 못 마신다고 투덜대기는커녕, 이제 더는 마실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 모습을 완전히 새롭게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이 저를 부러워하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술만 마시지 않을 뿐 여전히 사교적으로 어울리며 예전에 하던 모든 것을 하고 있고, 따분하게 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은 어떤 종류든 약물을 섭취하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러지 않으면, 왜 자신에게는 그것이 필요하고 그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 사람이 약물 없이도 행복하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친구들도 처음에는 제가 비사교적이고, 따분하고, 술 문제가 있다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음주 습관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샜군요. ‘술을 마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뒤의 장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려는 요점은 ‘사교적인 음주’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술기운이 돌면 그 즉시 사교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사교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뜻이며, 술을 마시지 않고 그렇게 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교적으로 어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목구멍으로 무엇을 밀어 넣느냐가 여러분을 사교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술에 사교적인 면이 있다는 것은 그저 또 하나의 잘못된 믿음입니다.
슬픈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이 술을 마시는 세상이라면 구타, 강간, 폭력, 말다툼, 불쾌한 행동과 지나치게 감정적인 행동으로 가득한 세상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진정한 용기와 자신감이 술 한두 병 속으로 사라져 버린, 스트레스 가득한 세상일 것입니다. 자살과 살인과 강도가 있는 세상일 것입니다. 가정이 고난을 겪고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세상일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술을 마신다면 세상은 바로 그런 모습일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실제로 그러하니까요.
이 장의 앞부분에서, 술을 마시면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언제나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금전적인 비용은 어떨까요? 술에 중독되어 있다는 이유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쓰게 될지 진지하게 계산해 본 적이 있나요? 저는 한 번도 그러지 않았지만, 한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술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니까요…